라틴어수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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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와 책

라틴어수업을 읽고

 

 

  [라틴어 수업] 이 책은 몇 년 전에도 읽으면서 소장욕구를 마구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어딘가에서 보고 들었던 라틴어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어원을 따라가며 익숙한 단어들의 숨은 뜻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인 한동일 교수님의 박학다식함에 감탄하며, 깊고 넓은 내용을 너무나 친숙하고 쉽게 풀어내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읽었다.

되풀이해서 마음에 새기고픈 문장들에 줄을 쳐 가며 읽고, 정리해보니 양이 제법 많다.

 

Defetus et Meritum(데펙투스 에트 메리툼) 장점과 단점

  우리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듯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관찰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뿐이죠. 자신의 약점과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과 직면했을 때 시선을 돌려 자신의 환경에 대해 불평해요.

Postquam nave flumen transiit,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포스트쾀 나베 플루멘 트란시이트, 나비스 렐린쿠엔다 에스트 인 플루미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

여러분의 메리툼은 무엇입니까? 데펙투스는요? 강을 건넜음에도 놔두지 못하고 계속 지고 가는 메리툼 아닌 메리툼은 무엇인가요? 본래 장점이었던 것도 단점이 되어 짐이 되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불네란트 옴네스, 울티마 네카트.)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그는 과연 내게 상처를 주었나? 그가 상처를 준 게 아니라 제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제가 아팠던 거예요. 상처받은 게 아니라 제 안에 감추고 싶은 어떤 것이 타인에 의해 확인될 때마다 상처를 받았다고 여겼던 것이죠. 어떤 사람은 모든 잘못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요. 내 안의 약함을 볼 때 기차가 ‘내 마음의 역’으로 향할 수 있도록 선로 전환기를 작동해야 하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신체적, 물리적 나이가 해결해주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 꼭 성숙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사고의 폭이 좁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꼭 피해야 할 어떤 것은 아닙니다. 상처는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니까요.

-->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당신은 00살이지만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당신이 나의 데펙투스를 생각하게 해주었군요.’하고 넘어가렵니다. 그러면서 괜히 내 주변을 탓하며 oo 때문에 내가 그런 거라고 변명하지 않으렵니다. 나의 상처를 대면하여 잘 치유하고 나면 오히려 나의 강력한 메리툼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각자 자기를 위한 ‘숨마 쿰 라우데’

라틴어의 성적 구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최우등

Magna ci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 우수

Cum laude 우등

Bebe 베네 좋음/잘했음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의 아기천사들을 케루빔이라고 부르는데, 다소 근엄한 표정의 아기 예수와 경외감에 사로잡힌 성모의 표정으로 무거워진 그림의 분위기에 재치를 더함으로써 균형을 잡아주고 있어요.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케루빔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더 비난하고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을 칭찬하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채찍만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 대한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최고의 천사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로마인의 나이 표기를 보면 젊은이를 나타내는 iuvenis(유베니스)는 만 20세부터 만 45세까지라네요. 젊은이란 호칭은 로마란 국가의 필요에 의해 구분된 것이긴 하지만 나이에 대한 강박을 덜어주는 순기능도 했네요. 우리는 보통 나와 같은 또래의 사람이 무언가 큰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는 그동안 뭐했나 싶은 생각을 하거나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하늘의 새를 보세요. 그 어떤 비둘기도 참새처럼 날지 않고, 종달새가 부엉이처럼 날지 않아요. 한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개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 윤종신의 ‘지친 하루’ 중 한 소절이 떠오르네요. 나는 내 인생을 알차게 즐기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집중하면 되는 거죠? 자꾸 바보처럼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 바라보며 책망만 하면 안 되는 거죠?

♫ 비교하지 마. 상관하지 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걷는 이곳이 나의 길~

부러운 친구의 여유에 질투하지는 마

순서가 조금 다른 것뿐.

딱 한 잔만큼의 눈물만, 뒤끝 없는 푸념들로

버텨줄래 그 날이 올 때까지~

달달한 디저트 티라미수tiramisu는 2인칭 명령 형태인 ‘티라tira’에 직접 목적어 ‘미mi’가 결합하고 방향을 가리키는 ‘위에, 위로’를 뜻하는 전치사 ‘수su’가 합쳐서 ‘나를 위로 끌어올리다’라는 의미를 가진대요.

 

라파엘로 시스티나 성모

 

 

Tempus est optimus iudex(템푸스 에스트 옵티머스이루덱스) 시간은 가장 훌륭한 재판관이다.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오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베오’는 ‘복되게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즉 ‘베아티투도’라는 단어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복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Desidero ergo sum(데지데로 에르고 숨)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사티스파체레satisfacere’란 동사는 ‘충분히 무언가를 하다’는 의미로, 충분히 무언가를 하면 거기에 만족감이 따라 온다는 뜻입니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위해 달릴 때 존재의 만족감을 느낄까요? 본질적으로 나를 충만하게 하는 욕망이 필요한 때입니다.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런 우울을 느끼게 되는 위치까지 올라가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쯤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어떤 진정성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Tantum videmus quantum scimus.(탄툼 비데무스 콴툼 쉬무스.) 우리가 아는 만큼, 그만큼 본다.

  사람마다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지만 그냥 오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영혼을 뒤흔든 무언가가 있습니까? 흔들리고 나아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천천히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을 아닌지, 깨어 있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카르페 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는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각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모하죠.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매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요?

Hoc quoque transibit!(혹 쿠오퀘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1241년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기쁘고 행복한 그 순간에는 최대한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되, 그것이 지나갈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웃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 지금을 살면 됩니다. 힘든 순간에는 절망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분노를 잠시 내일로 미뤄두는 겁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 내 인생에서 지나갈 뿐인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상처 받지도 말구요.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이 문장은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애용한 첫 인사말입니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대가, 이웃이 안녕하기를 바라고 있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하셨대요. 오래도록 스툴투스 에스(멍청이)로 남지 않으려면 멍청한 누군가가 겉으로 내뱉는 말 뒤에 숨은, 가슴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기억’에 대한 생각

‘나중에 죽어서 하늘에 갔을 때 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를 판단할까?’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제 기억을 기준으로 물어볼 것 같았습니다. 이 땅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불편하게 품고 간 기억과 아픔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생에서 삶의 기억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18장 18절 말씀입니다.

 

Dilige et fac quod vis.(딜리제 에트 팍 쿼드 비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신과 함께’가 생각나네요.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기억하지 못하는, 알지 못했던 실수와 죄들도 읊으며 심판을 받았지만요. 하루 하루 정화시켜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지금, 그리고 내가 세상을 뜬 후에도 내 삶에서 향기가 날 수 있도록...

 

Hodie mihi, cras tibi(호디에 미기, 크라스 티비)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인간은 죽어서 그 육신으로 향기를 내지 못하는 대신 타인에 간직된 기억으로 향기를 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기억이 좋으면 좋은 향기로, 그 기억이 나쁘면 나쁜 향기로 말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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